자연의 숨결을 온전히 들여다본 시간-소리없는 여행: 이어폰 없이 걸은 하루에 대해 소개하는 글이다.
도시의 일상은 늘 무언가를 듣는 것으로 채워진다. 지하철 안에서는 이어폰이 귀를 틀어막고, 거리에서는 음악이 무심히 배경이 된다. 커피를 마시는 순간에도 라디오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향이 공간을 점유한다. 그만큼 우리 삶은 많은 소리에 노출되어 있고, 때로는 그 소음과 음악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그런 일상 속에서 어느 날 문득, 아무런 소리 장치 없이 걷는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악도, 팟캐스트도, 심지어 소셜미디어 속 짧은 음성조차 배제한 채 오직 자연의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는 하루. 그렇게 ‘소리 없는 여행’은 시작되었다.
"귀를 막지 않자 비로소 들리는 것들"
아침 일찍 산책을 시작했다. 도시 외곽의 작은 숲길이었다. 평소 같았다면 발걸음과 동시에 재생 버튼을 눌렀겠지만, 이날만큼은 스마트폰을 주머니 깊숙이 넣고 이어폰도 꺼내지 않았다. 처음엔 어색했다. 너무 조용했다. 이른 시간이라 사람도 드물었고, 차도 거의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조용함 속에서 하나둘 들리기 시작한 소리들이 있었다.
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치는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 잎사귀 사이로 떨어지는 작은 빗방울의 울림. 처음에는 미약하게 들렸던 이 소리들이 점점 더 크게, 더 분명하게 다가왔다. 귀를 막고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내가 선택한 ‘소리들’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어폰이 없으니, 오히려 이 세상이 얼마나 다양한 소리를 품고 있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숲길을 따라 조금 더 들어서자, 발밑의 자갈이 부서지는 소리와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발걸음에 따라 리듬처럼 반복되었다. 새들의 울음소리는 종류마다 달랐고, 각각의 주파수와 높낮이로 아침 공기를 채웠다. 평소에는 배경으로만 여겼던 이 자연의 소리들이 어느새 풍경의 중심이 되었고, 그 흐름 속에서 걸음은 점점 느려졌다.
가던 길을 멈추고 나무 밑에 앉았다. 아무런 준비물도 없이, 오직 그 자리에 앉아 주변의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풍부한 감각이 채워졌다. 도심 속에서는 미처 감지하지 못했던 조용한 시간들이 그 자리에 있었다. 눈을 감고 있으니 바람이 옷깃을 스치는 소리조차 크게 다가왔고, 나뭇잎 하나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도 길게 들렸다.
그때 깨달았다. 우리가 소리 없이 존재하는 공간이라 여겼던 자연은 사실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단지 우리가 귀를 닫고 있었을 뿐이라는 것을. 이어폰이 우리를 보호해주는 동시에, 세상과의 연결을 끊고 있었던 건 아닐까.
"풍경이 아닌 '소리'를 따라 걷는 법"
이어폰 없이 여행을 한다는 것은 단지 귀를 비우는 행위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감각을 열어 두는 일에 가까웠다. 도시에서는 늘 시각에만 의존해 이동하지만, 이 여행에서는 귀가 방향을 정해주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물소리에 이끌려 발걸음을 옮기고, 나무 사이로 들리는 바람 소리에 머물게 되었다. 그렇게 소리는 더 이상 배경이 아니라, 길을 안내하는 주체가 되었다.
작은 계곡을 따라 걷다가 그 흐르는 소리에서 낯선 평온함을 느꼈다. 물은 누구에게도 설명하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도 무언가를 전하고 있었다. 이어폰을 꽂고 있었다면 결코 알아차릴 수 없었을 미세한 물살의 리듬과, 돌에 부딪혀 흩어지는 물소리의 층위가 오히려 명확하게 감지되었다. 이따금 지나가는 벌레의 날갯짓 소리조차도 그 공간에서는 결코 작지 않았다.
그 날 오후, 숲길을 지나 작은 해변 마을로 이동했다. 도착하자마자 발밑으로 들려오는 모래 밟는 소리, 파도와 자갈이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멀리서 들리는 어부의 고함과 어선의 모터 소리까지. 어느 하나 인공적으로 조작된 소리는 없었지만, 그 모든 것들이 하나의 곡처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해변 옆 바위 위에 잠시 앉아있자 바람이 바다를 타고 얼굴을 스치고, 갈매기가 허공을 가로지르며 울어댔다. 그 순간은 그저 '풍경을 보는' 여행이 아닌, '풍경을 듣는' 여정이었다.
기억에 남는 또 하나의 장면은, 마을 끝자락의 조용한 골목이었다. 전봇대에서 들려오는 미세한 전기 소리, 창문 너머로 새어나오는 국 끓는 냄비의 보글보글 소리, 고양이 발소리까지 들릴 만큼 조용한 거리. 그 모든 것이 연결되어 마치 한 편의 다큐멘터리처럼 느껴졌다. 아무런 설명 없이, 그러나 너무나 진실되게 다가오는 소리들의 조화. 이어폰을 끼고 있었더라면 절대 놓쳤을 순간이었다.
"소리 없는 여행이 남긴 울림"
그날 하루는 아무런 음악 없이 마무리되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도 이어폰은 꺼내지 않았다. 대신 그날 들었던 수많은 소리들을 조용히 되새기며 걸었다. 소리 없는 여행은, 역설적으로 수많은 소리를 귀에 남기는 여행이었다. 무심코 지나치던 자연의 세세한 소리들, 그리고 그 속에서 되찾은 내면의 고요함. 그것이 이 여행이 남긴 가장 큰 선물이었다.
특별한 프로그램이나 관광지를 찾지 않아도, 소리 하나만으로 충분히 충만한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비워낸 만큼 더 많은 것이 들어왔고, 익숙했던 여행의 틀을 벗어나 새로운 감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음악 없는 여행은 지루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형태의 몰입감을 선사했다. 그것은 내가 지금 이곳에 ‘존재하고 있다’는 아주 선명한 감각이었다.
가끔은 여행지의 경치보다 그곳의 소리가 더 오래 기억된다. 물소리, 바람 소리, 발소리, 그리고 침묵. 소리 없는 여행은 사실 침묵의 여행이 아니라, 그 침묵을 품은 풍경 속에서 진짜 소리를 발견하는 과정이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뒤에도, 문득 이어폰을 꺼내지 않은 채 거리를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 이유는 이제 분명하다. 소리를 지우지 않으면, 그 안에서 내가 들려오기 때문이다.
소리 없는 여행이 남긴 것은 조용한 울림이었다. 그것은 하루의 끝자락에서 귓가에 맴도는 낮은 숨소리, 아침을 깨운 산새의 첫 울음, 오후의 햇살에 묻어나는 나무 그림자 같은 것들이었다. 다음 여행도 꼭, 아무 소리도 듣지 않은 채 시작해볼 생각이다. 이번엔 또 어떤 새로운 소리들이 나를 맞이해줄지 기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