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사라진 읍성의 흔적을 찾아가는 여정을 기록한 글입니다. 읍성이 지닌 역사적 의미를 다시한번 되새기면서 감상해주세요.
"읍성이 지닌 역사적 의미"
읍성은 조선시대 지방 행정과 군사 방어의 핵심이자, 지역 사회의 상징적 공간이었다. 중앙의 왕권이 지방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기능한 동시에, 지역민들의 일상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었다는 점에서 단순한 성곽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읍성은 대부분 고려 후기부터 조선 전기에 걸쳐 본격적으로 축성되었으며, 각 고을의 행정 중심지이자 방어 거점으로 자리하였다. 고을 수령이 집무를 보던 관아와, 주민들이 모여 장을 열던 시장터, 의례가 이루어지던 향교와 문묘 등 주요 시설들이 읍성 내부 혹은 인근에 배치되었기 때문에, 읍성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작은 도시와 같았다.
이러한 읍성은 축성 방식과 입지에서도 지역적 특색을 드러낸다. 산지와 해안, 분지 등 각 지역의 지형에 따라 성벽은 토성에서 석성으로 변화하였고, 방어 시설의 배치 또한 달라졌다. 예컨대 경상도 지역은 왜구의 침입이 잦았기에 바닷길과 가까운 읍성들이 강화된 구조를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내륙의 충청도나 전라도 읍성은 비교적 평지에 자리하며 관아와 생활 공간의 기능이 강조되었다. 이처럼 읍성은 단순히 중앙 정부가 명령한 건축물이 아니라, 해당 지역 사회가 처한 역사적·지리적 환경의 집약체였다.
그러나 20세기 초, 근대화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읍성의 많은 부분은 철저히 훼손되었다. 일본은 식민지 통치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전통적 공간 구조를 해체하였으며, 특히 읍성의 성벽은 철거 대상이 되었다. 돌과 흙은 도로 건설이나 관청 건물의 자재로 전용되었고, 일부 성문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광복 이후에도 근대 도시 개발이 이어지면서 읍성은 더더욱 자취를 감추었다. 그 결과, 현재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읍성은 극히 드물며, 대부분은 터만 남아 있거나 일부 성곽이 복원된 상태에 그친다.
오늘날 우리가 읍성을 다시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것은 단순한 성벽이 아니라, 지역의 역사와 공동체 기억을 담아낸 생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사라진 흔적 속에서 복원된 기억"
읍성이 사라졌다는 사실은 단순히 옛 건축물의 멸실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역 정체성과 생활 기억의 상실을 의미한다. 예컨대 전라남도 나주의 읍성은 일제강점기 도시 정비 과정에서 거의 대부분의 성벽이 철거되었는데, 지금은 그 흔적조차 뚜렷이 확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발굴 조사와 문헌 기록을 통해 당시 읍성의 구조와 규모를 재구성하는 노력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주민들 사이에서도 ‘읍성 복원’은 단순한 유적 정비가 아니라, 지역의 자긍심을 되찾는 과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또한 경상남도 진주의 진주성은 임진왜란 당시의 치열한 전투로 잘 알려져 있으나, 사실 진주성 또한 일제강점기에 훼손이 심각했다. 현재 우리가 보는 진주성의 모습은 많은 부분이 복원된 형태다. 그러나 이러한 복원 과정에서 단순히 ‘옛 성곽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전시관과 체험 공간을 마련하여 역사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과거의 방어 공간이 오늘날에는 문화적 학습의 장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완전히 소실된 읍성의 경우에도 디지털 기술을 통해 그 흔적을 되살리려는 시도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고고학적 발굴 자료와 옛 지도, 문헌 기록을 토대로 3차원 복원 영상을 제작하여 온라인에서 공개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현장에서 직접 유적을 볼 수 없는 사람들도 읍성의 원래 모습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 일부 지자체는 가상현실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방문객들이 스마트 기기를 통해 읍성 내부를 걸어 다니는 듯한 체험을 제공한다. 이러한 새로운 방식은 단순히 과거를 추억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사라진 역사와 현재의 기술을 연결하는 의미 있는 시도로 평가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복원과 기록의 과정이 지역민들의 참여 속에서 이루어질 때 더 큰 의미를 가진다는 점이다. 단순히 전문가의 조사와 행정적 지원으로만 복원 사업이 추진되는 것이 아니라, 지역 주민들의 구술 기록, 옛 사진 제공, 생활사 증언이 함께 어우러질 때 읍성의 역사는 더욱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사라진 읍성의 흔적은 물리적 성곽에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기억 속에도 깊이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대 도시와 읍성의 공존 가능성"
오늘날 읍성의 흔적을 복원하거나 보존하는 일은 단순한 문화재 관리 차원을 넘어, 도시의 미래와 직결되는 과제이기도 하다. 근대화 과정에서 읍성이 철거된 주요 이유는 ‘도시 발전을 가로막는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성벽이 도로 개설을 방해하고, 성문은 교통 흐름을 제한한다는 이유로 철거되었다. 그러나 현대 도시에서는 오히려 이러한 역사적 흔적이 관광 자원으로, 그리고 도시 정체성의 상징으로 기능할 수 있다. 실제로 수원 화성은 도시 중심부에 자리하면서도 역사적 가치와 현대적 생활 공간이 공존하는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이는 단순히 성곽을 잘 보존했기 때문이 아니라, 성곽을 활용한 축제, 문화 행사, 관광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운영하며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었기 때문이다.
사라진 읍성을 되살리는 과정에서도 이러한 접근이 필요하다. 단순히 성곽을 복원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역 축제와 연계하고 교육 자원으로 활용하며, 주민들이 일상적으로 찾을 수 있는 공원이나 산책로와 결합할 수 있다. 성곽의 일부를 현대적 생활 공간과 접목하는 방식은 도시민들에게 과거와 현재가 연결되는 경험을 제공한다. 예컨대 성벽 터를 따라 조성된 산책로는 단순한 휴식 공간을 넘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지역의 역사를 되새기게 하는 의미를 지닌다.
또한, 보존 과정에서는 ‘원형 복원’과 ‘현대적 재해석’ 사이의 균형을 고민해야 한다. 일부는 원래의 성곽 구조를 최대한 충실히 되살리는 방식이 필요하지만, 이미 도시 개발이 진행된 구간에서는 현대 건축과 조화롭게 공존하는 방식이 더 현실적이다. 중요한 것은 성곽 자체가 완벽히 되살아나는가의 여부가 아니라, 그 흔적이 현대 사회 속에서 어떻게 의미를 새롭게 부여받는가이다.
나아가, 사라진 읍성을 기억하고 활용하는 방식은 단지 과거의 복원이 아니라, 미래 세대에게 역사와 공동체의 가치를 전승하는 중요한 교육적 자산이다. 어린 학생들이 자신의 고장에서 읍성이 있었음을 배우고, 그곳을 직접 걸으며 지역의 역사를 체험하는 순간, 읍성은 단순한 돌담이 아닌 살아 있는 교과서로 기능한다.
맺음말
사라진 읍성의 흔적을 찾는 여정은 과거의 돌담을 되살리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지역 사회의 기억을 회복하고,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는 문화적 과정이다. 성곽이 사라졌다고 해서 역사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라진 흔적 속에서 우리는 더 깊은 성찰을 얻을 수 있다. 남아 있는 돌 한 장, 기록 한 줄, 주민들의 기억 한 조각이 모여 읍성의 역사를 다시 세운다.
오늘날 읍성을 복원하고 보존하는 일은 단순히 과거를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도시와 지역 사회가 앞으로 어떤 정체성을 지향할 것인가를 묻는 작업이기도 하다. 사라진 읍성을 찾는 과정은 곧 우리가 누구이며, 어떤 공동체로 살아가고자 하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읍성의 흔적은 눈앞의 유적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비추는 거울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