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아무 말 없이 떠나는 조용한 여행의 기록

by 난모모띵 2025. 6. 10.

바람이 말을 걸 때, 비로소 들리는 풍경: 아무 말 없이 떠나는 조용한 여행의 기록을 세세하게 담은 글이다. 고요함이 주는 안정감에 대해 전달하려고 한다.

 

아무 말 없이 떠나는 조용한 여행의 기록
아무 말 없이 떠나는 조용한 여행의 기록

 

"소음 없는 길 위에서, 나를 다시 만나다"

 

여행을 떠날 때마다 우리는 저마다 다른 목적을 안고 길을 나선다. 어떤 이는 전혀 다른 문화를 체험하기 위해, 또 어떤 이는 유명한 관광지를 찾아 사진 속 장면을 현실로 마주하기 위해 떠난다. 그러나 이 모든 형태의 여행들 가운데,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조용한 여행에 끌리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조용한 여행은 그 자체로 어떤 선언에 가깝다. 복잡하고 분주한 세상에서 벗어나, 아무런 일정도, 누구의 시선도 없는 상태로 자신만의 시간을 갖는 것. 이는 어쩌면 잊고 지낸 자신을 다시 마주하기 위한 한 걸음일지도 모른다. 빠르게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우리는 종종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다. 생각할 시간도, 숨 돌릴 여유도 없이 일과 책임에 떠밀려 살다 보면, 어느 순간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조차 흐려지곤 한다.

내게 그런 순간이 찾아왔던 때가 있었다. 매일 똑같은 지하철, 반복되는 회의, 자꾸만 짧아지는 밤. 어느 날 문득 숨이 차올랐고, 그럴수록 사람들과의 대화조차 피하고 싶어졌다. 그때, 조용한 여행을 떠났다. 강원도 평창의 깊은 산골로. 인터넷 신호도 약했고, 약국 하나 없는 마을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나는 오랜만에 제 호흡을 들을 수 있었다.

해가 뜨면 해가 떠서, 해가 지면 해가 져서 하루의 리듬이 바뀌는 삶. 그렇게 단순하고 조용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나는 마치 낯선 사람처럼 나를 관찰할 수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 말하지 않아도 괜찮은 분위기 속에서,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할 수 있었다. 조용한 여행은 그렇게, 내가 나를 다시 만나는 길이 된다.

그 이후로도 나는 종종 조용한 여행을 반복했다. 가령, 가을 끝자락에 다녀온 제주도 서쪽 마을. 그곳은 관광객이 몰리는 해변과는 거리가 있었고, 오래된 돌담과 좁은 골목이 이어지는 조용한 마을이었다. 해 질 녘, 길을 따라 걷다 마주한 감나무 아래서 잠시 멈췄다. 바람에 흔들리는 감잎 소리가, 지나온 날들에 대한 이야기를 속삭이는 듯했다. 그렇게 사소한 장면들이 내 마음을 정화해주었다.

 

"고요함은 공간이 아니라 마음에서 비롯된다"

 

조용한 여행은 반드시 외딴 시골이나 무인도에서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도시 한복판에도 조용한 순간은 존재한다. 문제는 그 조용함을 인지할 수 있는 마음의 상태에 있다. 다시 말해, 고요함은 공간보다도 마음에서 비롯된다. 외부의 자극을 줄이고 내면에 집중하는 순간, 우리는 어디서든 ‘조용한 여행’을 시작할 수 있다.

서울 마포의 연남동에는 아직도 사람이 드문 이른 아침 골목이 있다. 카페가 문을 열기 전, 가게 앞 화분에 물을 주는 주인들의 모습을 멀찍이서 지켜보며 걷는 그 시간은 참으로 특별하다. 차분한 그 풍경 속에서, 나는 여행자라는 이름이 필요 없는 존재가 된다.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감각.

조용한 여행은 그런 감각을 일깨워준다. 청각은 더욱 민감해지고, 시야는 넓어지며, 감정은 차분해진다. 자극이 줄어든 자리에 자연스럽게 나 자신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평소에는 미뤄두었던 생각들, 마주하기 두려웠던 감정들조차 조용한 환경 속에서는 조금씩 떠오른다. 그로 인해 우리는 자신과 화해할 기회를 얻는다.

충청도 덕산에서 머물렀던 날을 떠올린다. 이른 새벽, 숙소 근처 논두렁길을 따라 걷고 있던 나에게 한 어르신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혼자 왔나?”라는 물음에 “그냥 조용히 있으려고요”라고 답하자, 그분은 “요즘 젊은 사람들도 조용한 게 필요하구먼” 하고 웃으셨다. 그 짧은 대화는 묘하게 따뜻했다. 말이 많지 않았지만, 그 안에 담긴 이해와 공감은 더 컸다. 조용한 여행은 그런 관계까지도 조용히 만들어낸다.

비슷한 경험은 서울 도봉산 아래쪽의 우이동 골목에서도 있었다. 카페도 많지 않고, 등산객이 떠난 늦은 오후에는 한적하기 그지없던 그 동네에서, 나는 길모퉁이 작은 분식집에 들어가 김치전을 주문했다. 조용한 라디오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노부부가 반죽을 부치고 계셨다. 아무 말 없이 먹고 나오는 길, 그 시간 전체가 마치 오래된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결국, 조용한 여행은 삶의 태도와도 닿아 있다. 삶을 서두르지 않고, 무엇이든 채우려 하지 않고, 오히려 비워내고 머무는 법을 배우는 것. 그런 연습이 조용한 여행 속에서 이루어진다. 우리가 의도적으로 ‘멈춤’을 선택할 때, 삶은 다시 숨을 쉬기 시작한다.

 

"일상으로 돌아와도, 마음속 조용한 골목을 기억한다"

 

모든 여행은 끝나고, 우리는 다시 익숙한 일상으로 돌아온다. 출근길의 지하철, 울리는 알림창, 반복되는 회의와 마감. 조용했던 여행지는 이내 과거가 되고, 다시 분주한 삶이 시작된다. 하지만 조용한 여행을 다녀온 사람은 다르다. 그 고요함의 감각이, 단지 그 순간에만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내게 남은 것은 강원도 어느 마을의 적막함뿐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시간 동안 배운 느린 호흡, 마음을 가라앉히는 태도, 그리고 침묵 속에서도 나를 들여다보는 법. 그것은 돌아온 후에도 여전히 내 안에 살아 있다.

도시의 번잡함 속에서도, 나는 가끔 마음속으로 그 조용한 골목을 떠올린다. 창밖으로 스치는 구름의 속도를 바라보며, 지하철 창문 너머로 스쳐 지나가는 이름 모를 동네를 바라보며. 그럴 때면 마치 마음 한켠에 여백이 생기는 것 같다. 그 여백은 나를 숨 쉬게 한다.

누군가 “좋은 여행이란 무엇인가요?”라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조용한 여행이야말로 좋은 여행이라고. 그리고 좋은 여행은 단순히 사진으로 남기기보다, 삶의 어떤 태도를 바꾸는 데 기여한다고. 소란한 세계 속에서도 조용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점에서, 조용한 여행은 결국 일상을 위한 예행연습이 된다.

앞으로도 나는 가끔 조용한 여행을 떠날 것이다. 어떤 날은 도시의 옥상에서, 어떤 날은 바닷가의 파도 소리 속에서. 여행이란 반드시 멀리 떠나는 것이 아니기에. 내 마음이 멈추고, 나를 돌아볼 수 있는 그 어느 공간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조용한 여행은 완성된다. 그리고 그런 여행이, 결국 나를 더욱 나답게 살아가게 해줄 것이다.

여행의 의미는 다양하다. 누군가에겐 일탈이고, 누군가에겐 치유이며, 또 다른 이에겐 기록일 수 있다. 그러나 조용한 여행은 그 모든 것 위에 '존재' 그 자체를 놓는다. 굳이 뭔가를 하지 않아도, 아무 말 없이도 충분한 여행. 그런 여행은 삶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방식이기도 하다.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조용히 나를 바라보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놓치기 쉬운 여행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한 번 그 고요한 길을 꿈꾼다. 내 안의 소음이 많아질수록, 바깥의 소란이 커질수록, 나는 다시 고요한 여행을 떠날 것이다. 그 길 끝에서 나 자신을 만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