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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풍경이 남은 골목’을 찾아서

by 난모모띵 2025. 6. 10.

시간이 머무른 자리에 스며들다, '오래된 풍경이 남은 골목'을 찾아서 떠나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 순간에 대한 글이다.

도시의 삶은 늘 빠르게 움직인다. 발걸음도, 시선도, 생각도 앞만 보고 내달리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하지만 그 빠름 속에서 문득 멈추고 싶을 때가 있다. 바쁜 거리, 높이 솟은 건물들, 시끄러운 교통 소음과는 다른, 조용하고 낡은 풍경이 그리워지는 순간. 그런 날에는 오래된 골목을 찾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다 낡았지만 그래서 더 정감 가는 곳. 그곳엔 아직도 시간이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이번에 찾은 곳은 서울의 외곽에 자리한 작은 동네였다. 개발의 손길이 덜 닿아 아직도 1980~90년대의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 지도에 이름은 있지만, 여행지 목록에서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 동네였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 이름이 낯설지 않았다. 어릴 적 외할머니 댁을 닮은 분위기 때문일까. 언젠가 지나쳤을 법한 흔한 골목이지만, 이상하리만큼 마음을 붙잡았다. 낡은 벽돌집과 철제 대문, 담벼락에 기댄 자전거, 그 위로 스며드는 아침 햇살까지. 이 골목엔 오랜 시간이 만들어 낸 고유의 색이 있었다.

 

‘오래된 풍경이 남은 골목’을 찾아서
‘오래된 풍경이 남은 골목’을 찾아서

 

"시간이 스며든 담벼락 아래에서"

 

골목 초입에는 오래된 구멍가게가 자리 잡고 있었다. 낡은 간판과 바래진 음료 광고, 그리고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과자 봉지들. 들어서자마자 들려오는 라디오 소리와 주인 할머니의 느릿한 인사에 마음이 놓인다. 몇 가지 간식을 고르고 나서 담벼락을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골목은 그리 넓지 않았다.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만한 너비였고, 벽과 벽 사이에 드리운 전깃줄이 마치 하늘을 가로지르는 선처럼 느껴졌다.

담벼락 아래에는 각자의 시간들이 놓여 있었다. 누군가는 분갈이를 마친 화분을 가지런히 놓아두었고, 누군가는 고장 난 우산을 말리듯 벽에 세워두었다. 이 작은 사물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풍경은 마치 어느 가족의 하루를 들여다보는 것처럼 따뜻했다. 벽면에 희미하게 남은 벽화, 누렇게 바랜 전단지, 그리고 옥상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까지도 그 자체로 풍경이었다.

이 골목은 대단한 스토리를 가진 공간은 아니었다. 유명한 벽화마을처럼 사진 명소가 있는 것도 아니고, 관광객이 북적이는 골목길도 아니다. 하지만 이곳엔 조용히 흐르는 시간이 있었다. 매일같이 골목을 쓸고 닦는 노인의 손길, 잠시 머물다 떠나는 동네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리고 벽 틈 사이로 피어난 잡초마저도 이 골목의 일부로 녹아 있었다.

그날은 서울 은평구 불광동에 위치한 ‘구파발 옛길’을 따라 걸었다. 지하철 3호선 종점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나타나는 그 길은, 과거 한양과 의주를 잇던 교통의 요지였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조용하고 한산한 길이 되어, 산책자들에게만 마음을 여는 곳이다. 조선 후기의 흔적이 담긴 옛 담장, 오래된 마당이 딸린 기와집들, 그리고 담벼락 틈에 숨어 있는 야생화들까지. 구파발 옛길은 과거와 현재가 조용히 공존하는 공간이다.

비슷한 정서를 가진 또 다른 공간으로는 강원도 강릉의 명주동 골목길이 있다. 요즘처럼 정비된 관광지로 알려지기 전, 그 골목은 구불구불하고 가파른 언덕을 따라 예스러운 주택들이 자리 잡고 있었고, 마당마다 정성스레 가꾼 장독대와 나무 화분들이 있었다. 그곳 역시 조용한 시간을 품고 있었고, 오래된 것의 아름다움을 말없이 보여주는 장소였다.

 

"작은 풍경 속, 낯선 평온"

 

골목을 걷다 보면 어김없이 마주치는 것이 있다. 바로 평상이 놓인 마당이다. 낮게 깔린 나무 평상 위엔 누군가 앉았다 간 흔적이 남아 있다. 놓여진 차 한 잔, 접힌 신문지, 그리고 반쯤 덮인 방석. 그 모든 것이 어떤 오후의 여유를 말해주는 듯했다. 주인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나는 조심스레 그 평상 앞에 서서 그 여유를 상상해 보았다. 이 골목의 주민들은 아마도 서로를 잘 알 것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누가 먼저 문을 여는지, 어느 집에 새 식구가 생겼는지, 그런 일들을 자연스럽게 나누며 살아갈 것이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동네 아이들이 비석치기를 하고 있었다. 돌멩이를 손에 들고 규칙을 설명하던 아이는, 어느새 나를 향해 조심스럽게 웃음을 보였다. 그 웃음은 말 한마디보다 더 많은 환영의 뜻을 담고 있었다. 나는 그저 길을 걷고 있을 뿐인데, 어느새 이 골목의 작은 한 장면이 되어 있었다.

돌아가는 길에 작은 찻집을 발견했다. 입구에는 손글씨로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라고 적혀 있었다. 안에는 할머니 한 분이 계셨고, 작은 라디오에서는 클래식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메뉴는 단출했지만, 정성스레 내려진 쌍화차 한 잔은 긴 골목 산책의 마무리로 더없이 적당했다. 그 찻집 창 너머로 바라본 골목의 풍경은, 이제 낯설지 않은 풍경이 되어 있었다.

경남 진주의 옛 도심인 중앙동 일대도 언젠가 꼭 다시 찾고 싶은 곳이다. 수십 년간 문을 지킨 이발소 간판, 마른 빨래처럼 벽에 붙은 철제 우편함들, 그리고 좁은 골목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전해주는 고요함. 아무리 바쁘게 걷고 있던 사람도 이 골목만 지나면 걸음을 느리게 하게 된다. 그만큼 골목이 품고 있는 이야기가 조용히 말을 걸어오기 때문이다.

 

"떠나온 길, 마음에 남은 오래된 풍경"

 

시간이 멈춘 듯한 골목을 걷는다는 것은 단순히 옛 건물을 보는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잊고 있던 감각들을 다시 꺼내는 일이었다. 빠르게 움직이는 세상 속에서 놓치고 지나쳤던 것들, 느린 호흡과 정적인 시간, 그리고 이름 없는 공간에 깃든 사연들을 하나하나 마음에 담는 일이었다.

오래된 골목은 그 자체로 한 권의 책 같다. 누군가의 이야기가 벽에 새겨져 있고, 누군가의 하루가 계단 위에 놓여 있다. 낡은 창문 틈새로 흘러나오는 밥 냄새, 저 멀리서 들려오는 동네 방송, 그리고 누군가의 기침 소리까지. 모든 것이 이 골목의 시간이자 기억이었다.

나는 종종 그 골목을 다시 떠올릴 것이다. 마음이 지치고 일상이 바빠질 때면, 그 느리게 흐르던 풍경들을 떠올리며 잠시 숨을 고를 것이다. 오래된 풍경은 사라져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누군가 조용히 다가와 그 시간 속으로 걸어들어오기를.

그래서 나는 다시 그 골목을 찾을 것이다. 빠르게 돌아가는 일상에서 잠시 멈추고, 천천히 걷는 법을 기억하기 위해서. 그리고 또다시 잊고 있던 것들을 되찾기 위해서.

그날의 기억은 서울의 한편 구석에 머물렀지만, 다음엔 전주의 한옥마을 골목 안으로 들어가 보고 싶다. 너무 잘 알려진 메인 스트리트가 아니라, 뒷길로 이어지는 오래된 돌담길과 구불구불한 샛길 말이다. 또 언젠가는 통영의 동피랑 벽화마을이 아닌, 그 아래에 남은 오래된 마을길을 걸어보고 싶다. 또는 포항 청림동처럼 해풍을 맞으며 세월을 견뎌온 골목에도 발을 들여보고 싶다. 각 도시마다, 숨은 골목마다, 또 하나의 시간이 켜켜이 쌓여 있음을 믿기에. 느리게 걷는 법을 아는 사람이라면, 분명 그 오래된 풍경 속에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