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과 물소리가 들려주는, 나만의 조용한 시간- 이 글은 산속 계곡 옆 민박집에서 1박 2일 혼행기를 다룬 글이다. 시끄러운 도시를 벗어나 자연에서 치유했던 이야기를 전달하려고 한다.
서울에서 출발해 인제로 향하는 길은 생각보다 멀지 않았다.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이 하나둘 도시의 윤곽을 지우고, 초록빛으로 덮인 산의 실루엣이 점차 또렷해질 때쯤, 이 여행이 진짜로 시작되고 있음을 실감하게 되었다. 빠르게 움직이는 고속도로를 벗어나 지방도로를 따라 천천히 달리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시간의 흐름마저 느긋해지는 듯한 기분이 든다. 도심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고요가 주변을 감싸고, 그것만으로도 이미 절반은 쉼을 얻은 듯한 느낌이었다.
"도시의 소음을 벗어난 첫걸음"
어느 날 아침, 무심코 켜놓은 뉴스 속 이야기들이 왠지 멀게만 느껴졌다. 사람들의 빠른 걸음, 멈추지 않는 대화, 연달아 울리는 알림음은 이제 익숙하기보단 버거운 풍경이 되었다. 아침마다 허겁지겁 집을 나서고, 저녁이 되면 지친 몸으로 다시 돌아오는 일상이 반복되면서, 문득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다’는 충동이 찾아왔다. 멀리 가지 않아도 좋았다. 누구도 나를 모르는 곳, 잠시 세상과 거리를 두고 쉴 수 있는 장소면 충분했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생활 속에서 문득 멈춰 서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을 뜨면 들려오는 자동차 소리, 늘 켜진 알림창, 그리고 시간에 쫓기듯 흘러가는 하루. 바쁘게 흘러가는 도심 속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이 어느 날 유독 짙게 밀려왔다. 그럴 땐 멀리 떠나는 것보다는, 조용한 숲이나 계곡 옆에서 하루 이틀 머무는 일이 더 깊은 쉼을 안겨준다. 바다보다 덜 알려지고, 산보다 조용한 그 어딘가에서 나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혼자 떠난 여행의 목적지는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 방태산 자락에 위치한 작은 민박집이었다. 방태산은 설악산과 오대산의 유명세에 가려 있지만, 그래서 더 조용하고 사람의 손길이 덜 닿은 숲을 품고 있다. 이 일대는 국립공원은 아니지만 국유림 보호지구로 관리되며, 무분별한 개발 대신 자연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내가 묵었던 민박은 산기슭 아래 작은 계곡 옆에 자리한 오래된 가옥을 개조한 곳으로, 마당엔 낡은 평상이 놓여 있고, 뒤편으론 맑은 물이 흐르는 작은 계곡이 이어졌다.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들려온 소리는 ‘침묵’이었다. 차가 멈추고, 문을 닫는 소리마저 또렷하게 들릴 만큼 이곳은 조용했다. 이어지는 건 계곡을 타고 흐르는 물소리, 나뭇가지 위에서 들려오는 산새의 울음뿐. 도시에서 잊고 살던 자연의 소리들이 머리와 가슴을 가득 채웠다. 숙소 주인인 중년의 부부는 낯선 손님에게도 따뜻한 인사를 건넸고, 아궁이에 장작을 넣는 모습마저도 정겹게 느껴졌다.
민박집 안은 투박하지만 깨끗했다. 방 한 칸과 작은 주방, 그리고 오래된 화로가 놓인 마루. 벽에는 직접 찍은 사진 몇 장이 걸려 있었고, 창문 너머로는 끝없이 이어지는 숲이 보였다. 이런 공간은 화려하진 않아도 그 자체로 충분히 편안하다.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기엔 더없이 좋은 곳이다. 짐을 풀고, 평상에 앉아 숨을 고르자마자 ‘아, 잘 왔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여기서의 시간은 더디지만 무척 풍요로웠다. 도시에서 늘 바쁘게 흘러가던 시간과 달리, 이곳에선 해가 천천히 움직이고 새소리와 계곡물이 시간을 부드럽게 감쌌다. 무심코 창문을 열면 산들바람이 부드럽게 불어왔고, 나무잎이 살랑이는 소리는 하루의 여백을 채웠다. 스마트폰은 거의 사용하지 않았고, 인터넷 연결도 거의 되지 않아 오히려 더 집중해서 주변의 자연을 느낄 수 있었다. 평소라면 놓치기 쉬운 작은 새의 울음, 나뭇가지에 내리는 빗방울, 돌 위에 떨어진 잎사귀의 그림자까지 감각이 깨어나는 경험이었다.
"계곡 옆을 걷는 시간, 흐름 속에 머무르다"
다음 날 아침, 해가 숲 사이로 천천히 얼굴을 내밀었다. 나는 일찍 일어나 계곡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방태산의 능선을 따라 흐르는 이 계곡은 이름조차 없는 작은 물줄기였지만, 그 청량함은 여느 유명한 관광지 못지않았다. 바위 사이로 흘러내리는 물, 간간이 떨어지는 물방울, 그리고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이끼. 도시에서는 쉽게 접할 수 없는, 자연 그대로의 소리와 빛이 그 길을 채우고 있었다.
길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오솔길은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은 듯 조용했고, 군데군데 야생화가 피어 있었다. 들국화, 벌개미취, 그리고 이름 모를 작은 풀꽃들이 어우러져 나지막한 풍경을 만들었다. 발걸음은 자연스레 느려졌고, 걷는 행위 그 자체가 하나의 명상이 되었다. 이어폰도 없이, 누구의 말도 없이, 그저 물소리와 발자국 소리만으로 채워지는 시간이란 생각보다 풍요롭고 깊었다.
잠시 멈춰 계곡 옆 바위에 앉아 물에 발을 담갔다. 차가운 물이 피부를 타고 흐르는 순간, 머릿속의 잡념들이 씻겨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아무 말 없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여행이란 결국 무엇을 보느냐보다, 어떻게 머무느냐의 문제라는 생각이 스쳤다. 이처럼 조용히 앉아 자연과 함께 흐르는 시간 속에 있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여행이 아닐까.
계곡을 따라 걷는 동안 마음 한켠에선 점점 무언가가 정화되는 기분이 들었다. 일상의 번잡함과 쌓였던 스트레스가 흐르는 물과 함께 자연 속으로 스며드는 듯했다. 발밑에 깔린 낙엽과 돌, 그리고 물소리는 자연이 내어주는 최고의 선물임을 새삼 깨달았다. 누구도 방해하지 않는 이 고요한 순간은 오롯이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이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쉼’이 무엇인지 몸소 느낄 수 있었다.
"산속 하룻밤이 남긴 여운"
해가 저물고 다시 민박집으로 돌아왔다. 주인은 정성껏 차려준 된장찌개와 산나물 반찬을 내어주었다. 진동리 인근에서 직접 캔 곰취와 두릅, 그리고 된장도 집에서 담근 것이라고 했다. 습관처럼 손에 들고 있던 스마트폰은 어느새 테이블 구석에 밀려나 있었고, 그 자리를 음식과 대화가 대신했다. 전기도 약하고, 와이파이도 잡히지 않는 이곳에서 저녁은 느리고 조용하게 흘렀다.
밤이 깊어지자 창밖은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겼고, 그 어둠을 뚫고 들려오는 것은 여전히 계곡물 소리였다. 어릴 적 들었던 라디오 소리, 장작 타는 소리, 그리고 누군가 잠든 방 안의 숨소리처럼 그 물소리는 공간을 부드럽게 감쌌다.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밤을 맞이하는 감각. 그 밤은 짧았지만, 그만큼 농밀했다.
다음 날 아침, 돌아오는 길은 이상하게도 아쉬움이 크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속이 가볍고 단단해진 느낌이었다. 여행이 무언가를 얻는 것이 아니라, 잠시 잊고 있던 감각을 다시 되살리는 일이라면, 이 산속 하룻밤은 충분히 그런 시간을 만들어주었다. 진동리, 방태산 자락의 그 민박집은 앞으로도 종종 마음속으로 다시 찾아갈 수 있는 조용한 안식처로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