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숨결을 따라 걷는 고요한 마을의 시간: 옛 시인의 흔적이 남은 마을 산책기에 대한 글이다.
길을 떠나기 전, 나는 늘 지도를 오래 들여다본다. 이번에도 그랬다. 단순히 지명이나 경로를 확인하기보다는, 그곳에 어떤 결이 흐르고 있을지를 상상하며 바라보았다. 도시의 빠른 리듬에서 잠시 벗어나고 싶었던 나는, 문학이 깃든 고요한 마을을 찾고 있었다. 그렇게 오래전 시인이 머물렀던 마을로 시선을 돌렸다.
우리가 어떤 장소를 걷는다는 건 단지 그 길을 밟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남아 있는 시간의 결을 함께 따라가는 일이다. 특히 그곳이 오래된 시인의 자취가 깃든 마을이라면, 풍경 너머로 사람의 체온 같은 문장이 배어 있는 느낌을 받게 된다. 문학이 자리잡은 마을은 하나같이 소박하고, 조용하며, 그 안에 흐르는 리듬은 시인의 숨결처럼 은근하다.
"시가 남긴 자리에서 시작된 산책"
우리가 어떤 장소를 걷는다는 건 단지 그 길을 밟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남아 있는 시간의 결을 함께 따라가는 일이다. 특히 그곳이 오래된 시인의 자취가 깃든 마을이라면, 풍경 너머로 사람의 체온 같은 문장이 배어 있는 느낌을 받게 된다. 문학이 자리잡은 마을은 하나같이 소박하고, 조용하며, 그 안에 흐르는 리듬은 시인의 숨결처럼 은근하다.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의 ‘권태응 생가마을’은 시인 권태응의 유년 시절이 담긴 고요한 곳이다. 아담한 초가집과 돌담이 이어진 골목길을 따라 걷다 보면, 그의 동시처럼 순수한 마음이 저절로 되살아나는 기분이다. 마을 안에는 권태응의 대표 동시와 짧은 시구가 적힌 나무판이 여러 곳에 놓여 있다.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처럼 잘 알려진 구절을 음미하다 보면, 그 시절 아이들의 목소리가 골목을 맴도는 듯하다.
이 마을은 유명한 문학관이나 관광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렇기에 더 오래 머무르고 싶어진다. 조용한 기운 속에서 천천히 시를 되새기며 걷는 일은, 단순한 여행이 아닌 사색의 시간이 된다. 길가의 감나무, 담벼락 위의 고양이, 마당에 말린 고추조차도 한 편의 시처럼 다가오는 풍경이다. 마을 어귀의 정자에 앉아 있으면 지나가는 어르신이 반갑게 인사를 건네고, 그 순간조차도 한 줄의 시가 된다.
또한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의 ‘이육사 시비 공원’은 비록 시인의 출생지는 아니지만, 그의 저항정신과 문학세계가 담긴 공간으로 조성되어 있다. 통일 전망대에서 그리 멀지 않은 위치에 있으며, 평화와 기억, 그리고 시가 어우러진 이 풍경은 방문자에게 묵직한 울림을 준다. 이육사의 시 중 "광야"를 이곳에서 다시 읽으면, 그 말들이 단순한 문장이 아닌 현실의 공기로 다가온다.
"한 편의 시가 되어버린 마을 풍경들"
이런 ‘문학의 향기’가 머무는 마을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도 있다.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에 위치한 ‘백석 생가 터’는 지금은 남은 것이 많지 않지만, 그 언저리엔 여전히 그의 언어가 남긴 여운이 감돈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그 몽환적 이미지가 이따금 안개 낀 아침 풍경과 겹쳐지곤 한다. 백석이 그토록 그리워했던 고향의 감정이, 이 마을을 걷는 이의 마음에도 잔잔히 번진다. 그의 시처럼 아련하고도 따뜻한 정서가 골목마다 퍼져 있다.
충청북도 충주시 가주동에는 김소월 시인의 시비가 조용히 놓여 있다. 산과 들로 둘러싸인 이 마을에는 관광객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지만, 소월의 시 “진달래꽃”을 읊으며 오르는 마을 언덕은 시인의 감정을 몸으로 느끼는 산책길이 된다. 이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말수가 줄고, 마음이 조용해진다. 마치 내면의 문장들이 하나씩 꺼내어지는 듯한 시간이다. 계절에 따라 피어나는 들꽃들은 시인의 상념과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또한 전라북도 정읍에는 ‘정지용 시인 문학길’이 조성되어 있다. 정지용의 유년기를 품고 있는 이 길은, 단순히 시비를 모아놓은 관광 동선이 아니다. 길 자체가 시가 되고, 풍경이 문장이 되는 듯한 독특한 공간이다. 강물 따라 이어진 산책길에는 정지용의 시가 곳곳에 새겨져 있고, 자연과 시의 조화 속에서 걷는 이는 절로 시인의 시선을 상상하게 된다. 마을 주민들 역시 시인의 이야기를 따뜻하게 들려주며, 이 길을 더욱 특별한 기억으로 만든다.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들판 또한 문학과 인연이 깊다.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의 배경지로 유명하지만, 그 소설을 둘러싼 실제 마을의 분위기는 매우 차분하고 서정적이다. 들판을 가로지르는 바람, 노랗게 익은 벼, 그리고 다리 건너 위치한 최참판댁의 담벼락이 마치 이야기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느낌을 준다. 이곳에서의 산책은 단지 역사적인 장소를 걷는 것이 아니라, 인물의 감정선을 따라가는 일종의 문학적 몰입 체험이 된다.
"문장이 남긴 자리에 나를 내려놓다"
문학이 남긴 마을을 걷는다는 건, 결국 그 시인의 시선과 걸음에 나를 겹쳐보는 일이다. 단순히 “시를 읽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머물렀던 풍경, 앉았던 돌, 바라보았던 나무와 하늘을 함께 바라보는 일이다. 그렇게 시인의 삶과 자신의 삶이 살짝 겹쳐지는 찰나, 우리는 그 문장의 본래 온도를 이해하게 된다. 그 감정은 관광이 아닌, 머무름을 통해 비로소 온전히 느낄 수 있다.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의 ‘태백산맥 문학관’ 인근 마을도 꼭 소개하고 싶다. 비록 소설 중심의 문학관이지만, 주변 마을과 골목길은 조정래 작가가 썼던 시대의 흔적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낡은 기와집, 오래된 빨래줄, 쇠창살이 달린 창문 하나하나가 문학 속 등장인물의 배경이 되어주고, 독자였던 나도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이 골목들을 걷다 보면, 나 또한 글을 쓰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
제주도 조천읍 남조로에 있는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은 비록 사진 예술의 공간이지만, 그가 머물던 옛 마을의 분위기는 시와 같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적막한 돌담길, 세월이 앉은 초가지붕, 잔잔한 바람 소리. 이 모든 것이 시 한 편 없이도 시 같은 풍경을 완성한다. 방문객들은 말없이 걷고, 그 침묵 속에서 각자의 문장을 떠올린다. 문학적 감성은 결국 말보다 긴 침묵에서 더 잘 자란다.
경북 상주의 화서면 ‘우복동’도 빼놓을 수 없다. 이 마을은 퇴계 이황 선생이 말년에 머물며 학문과 시를 가꾸던 곳으로, 주변 풍광이 마치 조선시대 한 폭의 수묵화처럼 펼쳐진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계곡물 소리가 잔잔히 흐르는 이곳은 고즈넉한 산책과 사색에 최적의 장소다. 이황의 시구를 마음에 담고 걷다 보면, 자신만의 시를 머릿속에 그려보게 된다.
결국 시인이 남긴 마을은 그 자체로 시가 된다. 시는 종이 위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골목을 돌면 툭 하고 나타나고, 나무 그늘 아래 조용히 앉아 있다가, 바람을 타고 불현듯 귓가로 스며든다. 그러니 이 마을들에서의 산책은, 책장을 넘기는 것보다 느리고, 음미하는 데 더 시간이 걸리지만, 그만큼 오래 남는다. 언젠가 마음이 어수선할 때, 문장 한 줄이 아닌 한 마을을 떠올릴 수 있다면, 그것은 아마 이처럼 조용한 산책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