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이 낯설어서 더 궁금했던 그곳들 - 지도에서 찾은 이상한 이름의 마을 여행기를 자세히 알려주는 글이다.
지도를 훑다 보면, 익숙한 도시 이름들 사이로 낯설고 기이한 이름의 마을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온다. ‘고요리’, ‘멍텅구리’, ‘조무락골’, ‘물안골’… 처음 보는 단어인데도 이상하게 끌린다. 그런 이름 하나하나가, 마치 오랜 시간 동안 조용히 자리를 지키며 그 마을만의 이야기를 품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유명한 명소도, 인기 관광지의 화려함도 없지만, 오히려 그 무심한 이름들 속에서 진짜 시골의 풍경이 스며든다.
이번 여행은 바로 그런 이름에 이끌려 떠난 여정이다. ‘무슨 사연이 있을까’, ‘왜 이런 이름이 붙었을까’ 하는 단순한 호기심이 출발점이었고, 지도에서 찾은 마을들은 그 기대를 배반하지 않고, 조용하지만 단단한 인상을 남겼다.
"멍텅구리 마을, 바보 같은 이름에 담긴 순한 풍경"
경남 의령군에는 ‘멍텅구리’라는 이름의 마을이 있다. 지도에 찍힌 순간부터 궁금했다. 마을 주민들도 처음엔 그 이름 때문에 놀랐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기이한 지명은 실은 ‘멍텅’, 즉 멍하니 고요한 땅이라는 뜻에서 유래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실제로 마을에 들어서면 이 이름이 어색하지 않다.
마을은 크지 않다. 논과 밭 사이로 난 좁은 길을 따라 걷다 보면, 흙벽을 덧댄 오래된 가옥과 마당에 널어놓은 나뭇더미들이 이어진다. 마을 어귀에는 이름을 따서 만든 ‘멍텅쉼터’라는 작은 정자도 있다. 그곳에 앉아 있으면, 바람 소리와 함께 개 짖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고, 산모퉁이 너머로 구름이 느리게 움직이는 것이 보인다.
주민 중 한 분은 이 마을에서 평생을 살아왔다고 했다. “이름이 이상해서 사람들이 잘 안 오지만, 그게 오히려 좋지요.”라고 말하며, 기웃거리던 나를 향해 따뜻하게 웃어주었다. 그 말처럼, 이름은 특이하지만 풍경은 가장 평범한 시골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평범함이 오히려 도시에서 벗어난 이방인에게는 가장 특별한 경험이 된다.
근처의 ‘두문마을’ 역시 조용함이 일상이 된 곳이다. 경북 봉화군 석포면에 위치한 이 마을은 이름처럼 문이 두 개 달린 듯한 좁은 입구를 지나야만 들어갈 수 있다. 그 속에는 아담한 민가와 계곡물이 흐르는 작은 다리가 있다. 여름이면 주민들이 직접 만든 나무 그늘막 아래서 손님과 함께 더위를 피하고, 겨울에는 집집마다 연기가 피어올라 이곳의 생활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조무락골, 작지만 깊은 골짜기의 숨은 마을"
강원도 정선에는 ‘조무락골’이라는 마을이 있다. 마을 이름부터 소리 내어 부르면, 꼭 어린 시절 장난기 가득한 별명을 부르는 듯한 기분이 든다. 이곳은 정선군 신동읍에 자리한 조그마한 마을로, 마을 전체가 깊은 산골짜기 안에 오밀조밀 들어서 있다. '조무락'은 옛말로 '자잘하고 조촐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차 한 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언뜻 마을이 보이지 않아 다시 내려가야 하나 싶다가도 갑자기 시야가 트이면서 작고 소박한 마을이 모습을 드러낸다. 고즈넉한 집들과 마당의 꽃들, 돌담길 사이로 이어진 좁은 골목이 마치 시간의 틈 사이에 끼어 있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조무락골의 가장 큰 매력은 그 고요함이다. 해가 중천에 떠 있어도 마을은 조용하다. 어르신 한 분이 마당에 앉아 콩깍지를 벗기고 계시고, 한쪽에는 염소가 한가로이 풀을 뜯는다. 동네 아이들은 없고, 휴대폰 신호도 약하지만, 그 모든 부족함이 오히려 마음을 가볍게 해준다.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의 ‘광덕리’도 비슷한 분위기를 품고 있다. 이름처럼 평범하지만, 이 마을은 파로호에서 뻗은 물길 옆으로 펼쳐져 있다. 해 질 무렵이면 마을 뒤편 산그늘이 길게 내려오고, 주민들은 천천히 그늘 속으로 빨래를 걷고, 마당에 물을 준다. 그렇게 광덕리는 조용한 저녁이 일상이 되는 마을이다.
"고요리, 조용함이 이름이 된 마을"
전남 장성군 황룡면에 위치한 ‘고요리’는 이름부터가 여행자에게 속삭이는 듯하다. ‘조용한 곳으로 와요’라는 초대처럼 느껴지던 이 마을은, 실로 그 이름에 걸맞은 고즈넉함을 품고 있었다.
고요리는 주말에도 인적이 드물다. 특히 평일 아침에 이 마을을 찾는다면, 새소리와 바람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간혹 먼 길을 걷는 등산객들이 지나가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이 마을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그만큼 조용히 자기 삶을 이어가는 곳이다.
마을 입구에는 작은 연못이 있고, 그 옆에 앉아 있으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연꽃이 잔잔한 수면 위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고, 머릿속도 덩달아 느긋해진다. 마을의 중심에는 오래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있고, 그 아래 벤치에는 누군가 적어둔 짧은 시가 적혀 있다. "바쁘게 살다 왔다면, 이곳에서는 잠시 쉬어가도 좋습니다."
고요리는 그런 곳이다. 대단한 명소가 있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먹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 자체로 쉼이 되는 마을. 이름처럼 조용하고, 머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는 곳이다.
또한 충북 제천시 덕산면의 ‘도전리’도 빼놓을 수 없다. 이 마을은 이름만 들으면 도전정신이 넘치는 곳 같지만, 실제로는 깊은 산속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소리와 함께 지극히 차분한 마을이다. 주민들은 대부분 농사와 임산물 채취로 생계를 이어가며, 여름철에는 계곡 아래 작은 평상에서 손님에게 막걸리 한 잔을 권하기도 한다. 이곳도 ‘도전’이라는 이름과는 달리 마음을 쉬게 만드는 마을이었다.
이름이 특이해서 떠났지만, 마음이 머무른 여행
사람들은 흔히 여행지를 정할 때 ‘볼거리’를 먼저 찾는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이름에서 시작되었다. 지도 위에서 문득 발견한 낯선 이름의 마을들이 그저 재미로 시작된 호기심을, 묵직한 여운으로 바꾸어 놓았다.
멍텅구리처럼 순한 풍경이 있고, 조무락골처럼 깊은 골짜기에는 고요함이 있다. 그리고 고요리처럼 단순하지만 깊은 울림을 주는 장소도 있다. 광덕리, 도전리, 두문마을처럼 조용한 이름의 마을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우리를 맞이한다.
이 마을들은 유명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조용하고, 외롭지 않기 때문에 더욱 편안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도 위에는 수많은 이름 없는 마을들이 있다. 이름이 이상하다고 생각되면, 오히려 한 번쯤 가보길 권하고 싶다. 그 이름 속에는 그 마을이 지켜온 시간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단지 스쳐 지나가는 풍경이 아니라, 마음 한 켠에 조용히 머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할 때, 이런 여행이야말로 진짜 여행이 되어줄 것이다.